역사속 등장 인물
1. 아이누와 코로폭크루
이야기는 전설의 시대부터 시작된다.
【코로폭크루】
아이누의 전설중에 나오는 소인. 아이누어로「머위잎 아래의 사람 」이라는 의미이다.
2. 다카다야 가헤에 시대
하코다테의 번영은 다카다야 가헤에로 대표되는 상인들에 의해 쌓아 올려졌다.
【다카다야 가헤에】
1769 년생. 관서 지방과 북해도의 교역으로 큰 이익을 얻었다. 그 후, 막부의 명을 받아 쿠나시리, 에토로후의 항로 및 어장을 개척해, 북해도에 있어서의 해운을 단독 인수한다.
러시아와의 교섭에서도 수완을 발휘.
조선, 토목, 식림등의 분야에 사재를 투자해 폭넓게 하코다테의 발전에 공헌했다.
【츠즈키 토요지】
1798 년생. 조선공. 페리 내항시 미국 배에 흥미를 가져, 이후 독학으로 서양식 배에 대해 공부해, 마침내 서양식 범선「하코다테마루」을 완성시킨다. 그 공으로 막부에서 사용하는 배의 책임자로 임명되어 많은 서양식 배를 만들었다. 다카다야 가헤에의 조선소에 근무했던 적이 있다.
3. 페리와 흑선함대의 내항, 하코다테 개항
하코다테항이 무역항이 되어, 해외 문화가 들어오기 시작했던 시대
【페리 제독】
1854년 페리 제독의 내항을 계기로, 막부는 쇄국 정책을 포기하고, 나가사키, 카나가와, 하코다테, 니이가타, 코베 등을 개항, 많은 나라와의 교류가 시작되었다.
4. 고료카쿠의 건설과 완성, 학문의 기회 균등
1857년, 외국으로부터의 위협에 대비하여, 국내 최초의 서양식 축성방법을 이용한 고료카쿠의 건설이 시작되었다 (완성은 1864년). 2010년 7월, 고료카쿠 내에 오픈한 하코다테 봉행소는 당시의 사진과 도면을 기초로 복원된 것이다.
1856년 하코다테 봉행소는「제술조소」을 창설했다. 이것은 에도(동경)의 「번서조소」가 인문과학계를 중심으로 가르친 것에 대해, 네델란드어, 항해술, 물리, 화학, 포술 등, 이학계를 중심으로 가르쳤다. 교수는 다케다 아야사부로. 그는 무사와 일반백성을 차별하는 일 없이, 능력에 따라 기회를 주었으므로, 그의 아래에 근대 일본을 이끌어 낸 많은 인재가 모였다.
다케다는「막부 말기의 레오나르도·다·빈치」라 불리며, 그 재능은 일본의 첫 서양식 성곽 고료카쿠나 하코다테항내 포대의 입안·설계 등에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5. 하코다테 전쟁
신정부군에 쫓긴 에노모토 타케아키, 히지카타 토시죠, 프랑스인 브류네 등이 하코다테에「에조 공화국」을 만들려고 하는 시대.
【에노모토 타케아키】
1836년생. 막부의 장군을 직접 섬기던 신하. 네델란드에 유학하여, 해군 관계의 학문과 법률을 배워 귀국하지만, 그 때는 벌써 메이지 유신의 동란기에 있어기에, 그는 함대를 이끌고 하코다테 고료카쿠에 입성 해, 신정부군과 싸운다. 1868년 항복. 복역 뒤 사면되어 정치에 복귀후 북해도 개척에 임한다. 후에 러시아 공사, 해군, 체신, 문부, 농상무 등 각 대신을 역임. 1908년 서거. 71세.
【히지카타 토시죠】
1835년생. 에도(동경)에 가까운 히노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검술을 배워, 후에 콘도 이사미와 함께 신센구미를 결성한다. 막부의 명을 받아 쿄토를 경호하게 되면서 모두가 두려워 하는 존재가 된다. 정권이 막부로부터 신정부로 바뀐 뒤, 콘도와도 헤어져 동북 지방을 전전하다 하코다테에 건너 간다.
하코다테에서의 전투에서는 갓쿠미 고개에서 관군을 물리치고, 마츠마에성을 함락 시키는 등 모든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다. 그러나, 점령된 하코다테를 탈환하기 위해 시가지에 돌격, 잇뽕기 관문(현 하코다테시 와카마츠쵸) 근처에서 총에 맞아 생애를 끝낸다. 35세.
비장한 생애를 마친 미남자, 아직껏 인기가 높고, 잇뽕기 관문의 비에는 향이 끊어지는 일이 없다.
【줄·브류네】
프랑스의 군인. 나폴레옹 3세로부터 파견되어, 토쿠가와막부의 군사 고문이 되었지만 막부는 붕괴한다. 프랑스 정부로부터 퇴거 명령을 받지만 이를 거역하고, 에노모토의 군대에 합류한다.
하코다테 전쟁에서 항복 직전에 하코다테를 떠나 본국에 돌아간다. 귀국후, 우여곡절을 거치며 군인으로서 활약, 군사 참모총장까지 올라 간다.
6. 하코다테 대화재와 타쿠보쿠
몇번이고 대화재에 휩쓸린 하코다테이지만, 항구 축제를 계기로 서서히 활기를 회복한다. 한편, 이시카와 타쿠보쿠등 문인들의 활약도 있었다.
1886년 이후 화재로100채 이상 소실 27회, 1000채 이상 9회.
【이시카와 다쿠보쿠】
1886년생. 요절한 천재 시인. 하코다테에 온 것은 1907년 5월. 지역 잡지의 편집자로서의 일을 얻는다. 후에 야요이 초등학교의 대용교원이 되지만, 8월의 대화재로 잡지사도 초등학교도 소실, 부득이 9월에 하코다테를 떠날 것을 결의한다.
132일이라고 하는 단기간이었지만, 하코다테를 무대로 한 시는 세상에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오오모리의 바닷가에 기념상이 있고, 다치마치미사키에는 가족의 무덤이 있다. |